학문을 위한 공부라..

나의 고등학교 동문이 이제 자신은 교수가 되고 싶다며 자신의 학업생활을 술회했다.

우리 학교 교훈 있잖아. 그게 생각보다 우리 마음에 꽤 많이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그렇다.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선택하는 동문들이 정말 많다. 우리 설립자님이 보시면 정말 흐뭇해하실 광경이다. 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학문의 발전을 기하며 설립자님이 염원하셨던 ‘100명을 먹여살리는 1명의 천재’들이 되어갈 것이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참으로 오묘한 감정을 느낀다.

나 또한 교훈을 마음에 품고 사는 재학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동창 그 누구보다 가장 교훈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고 자부할 정도로 나 또한 공부하길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글로 여러번 되돌아봤듯 나는 그 꿈을 내려놓은지 오래다. 나는 내려놓은지 오래고, 그들은 이제서야 교훈을 마음에 받아들이니 이 교차의 순간이 뭐랄까, 마음 한 켠이 간지럽다.

교훈의 화신이었던 내가 학문과 멀어진 모습을 보며 혹자는 무정한 사회에 대고 ‘나마저 굴복시켰다’며 침뱉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보다, 내가 학문을 놓았던 건 내적인 입장이 바뀌어서이지 연구 사회의 이면 같은 외적인 요소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요 근래 졸업논문을 쓰며 연구참여를 하면서 ‘연구도 재밌게 있을만한 사회구나’를 느낀다. 학문을 좋아하는 천성은 바뀌지 않았다.

우리 고등학교 설립자님이 학교를 세우실 적에 의미했던 ‘학문’은 분명 부국강병을 위한 실력을 뜻하는 것이었다. 잠깐만 생각해봐도 두 개 이상의 의도가 녹아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학문을 위한 공부를 하라면서, 그 학문을 공부한 천재가 나라를 먹여살린다는 이야기한다? 한 천재가 학문에 뜻을 가지면 그 주변 사람들은 자연히 그것으로 혜택을 볼 것이니 천재는 사사로운 것에 여념두지 말라는 말인가? 어찌보면 유능한 경주마의 눈가리개 같게도 들린다. 과연 학문을 위한 학문은 무엇인가. 학문의 발전은 왜 칭송받는가? 그 자체로 숭고한 일이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학문의 연구주제들은 계시마냥 하늘에서 정해져 내려와 연구자들에게 임무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궁금해하고 목말라하는 연구 방향부터 연구가 착수되고 성과가 나온다. 우리가 염원하는 것부터 활발히 연구되고,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 분야들은 더디게 연구된다. 연구란게 기본적으로 모르는 것을 찾아내는 과정인데,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것들 중 어느 모르는 것을 밝히는지는 우리의 욕망이 결정한다. 즉, 아무리 학문발전의 숭고한 이름으로 포장해봤자 연구활동은 인류의 점잖은 욕망 분출에 불과하다. 과연 그것이 숭고한가?를 묻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적극 개척해나가는 유일한 종족으로서 자찬하고 싶은가? 를 묻는 것과 같다.

나는 그럴 마음이 없고, 그저 다른 지구촌 생명들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나의 가방끈의 어쩌면 마지막 1년이 될 수도 있는 기간을 달려오며 공부의 가치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나는 이제 연구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오, 교수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어디 써먹을 것도 아니면 왜 이리 열심히 공부했냐며 사회적(!) 비용을 아까워 할 수도 있겠지만, 내 나름대로 생각하기엔 취업을 위한 도구보다 큰 수확을 이미 거뒀다고 생각한다. 아, 그리고 열심히 하지도 않은 것 같고. ㅎㅎ

내가 지금껏 공부해온 것은 이를테면 생각하는 훈련을 거친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우리는 말을 배우며 생각을 차분히 하는 법을 배웠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공감할 수 있으며, 이를 토대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들이 어린 나이의 교육으로 빚어지고 비로소 생각하는 존재로서 인간이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판이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나는 거기에 하나 더 얹어서, 생존을 해결한 이후의 공부는 나를 인간에서 사람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잉여공부를 통해 받는 것은 삶의 고차원적인 희노애락들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다.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것들. 생존의 잣대로 봤을 때는 하등 쓸데없는 것들. 그런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음미하는 것이 생존 문제를 초월한 존재로서의 특권이다.

앞으로의 공부는 삶의 더 큰 재미, 더 깊은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내가 침이 마르도록 말해도 모자르지만,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경험을 넘어서 생각만 갖고도 할 수 있는 경험도 너무나 많다. 나는 그런 것들을 최대한 많이 경험하고, 적당히 아쉬울 즈음에 입맛 다시며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더 강렬하게, 더 제대로 노는 존재로 거듭나자.

p.s.

인류 이성의 정점, 지성의 복제기술인 범용 인공지능을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 인간의 자발적인 사고활동에 감탄한다. 인공지능들은 자신이 맡은 바의 일 내에서만 사고활동을 모방하지, 가만히 냅두면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배가 부른 순간에도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다음 끼니를 위해서 미리 생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뭐, 끝없는 욕심에 내가 할말은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사고하는 것은 생존과는 분리된 재미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