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지난 며칠 내가 사는 광주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더운 날이 이어지던 차에 찾아온 단비가 반가웠지만 또 이렇게 거세게 올 이유는 뭔지, 싶었다. 빗물은 갓길을 따라 금세 줄기차게 흘렀고, 나는 웅덩이에 샌달 신은 발을 씻으며 여름만의 색다른 이벤트를 즐겼다.

긴 검정 슬랙스 아랫단이 흠뻑 젖어가면서도 K 씨는 이런 날이 무척 좋다고 했다. “이런 날엔 아무도 나올 수 없으니깐요,” 라는 요상하면서도 조금 섬짓한, 또 조금은 장난기 섞인 그 말과 입꼬리를 나도 베시시 웃어넘겼다. 나설 때만해도 이보다 더 거셀 수는 없겠다고 느낀 비의 기세는 지난 날의 찌는 더위와 닮아 끝도 없이 더 거세졌다. 분명 갈 때는 도로였던 도로가 돌아올 때는 범람천이 되어 흘렀다.

비가 세차게 오는 날이면 나 또한 기분이 은은하게 좋다. 내 식물들이 아무래도 수돗물보단 자연비를 좋아하겠지 싶어서. 나는 익숙해져 못 느꼈을 수돗물 속 염소향을 또 불평하지는 못하고 하는 수없이 마셔왔을지도 모르기에, 본래 좋아했을 비를 맞히는 날엔 간만에 외식 나온 가족의 가장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 그래도 이렇게 많이 내리는 건 식폭행인가.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제 그렇게 내려서 설마하는 마음에 우산을 챙기러 되돌아가지 않았는데. 주문한 커피를 매장용 컵으로 옮겨담고 자리에 잠시 앉아 비가 잦아들길 기다렸지만 오늘도 빗줄기는 거세지기만 했다. 기다란 음봉을 보고 있으면서도 언젠간 반등하리라는 희망을 품다가 결국 원금도 까먹는 거라고 하던데. 지금이 가장 약한 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남은 커피를 단 번에 들이키고 길을 나섰다. 나는 바나나통에 주먹이 낀 원숭이가 되지 않을거야.

호기롭게 학교를 향해 달렸지만 주머니 없는 반바지에 비에 젖은 샌달은 내 최선의 뜀박질을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차림새였다. 뛰어가다가 보인 버스 정류장에서 한 템포 쉬어가고 싶었지만 쳐다보는 사람들 눈을 버티는 것도 얼마 못할 것 같아 그대로 지나쳐 뛰었다. 그깟 우산 값 오천원 아끼겠다고 비를 뚫고 뛰어가는 고집불통 구두쇠 뚜벅이로 뵈는 게 싫었다. 앞을 가리는 안경도 벗어 쥐고 얼굴도 연신 닦으며 멈추지 않고 달렸다.

옷이 젖어갈 수록 후회는 깊어갔지만 돌아가는 건 또 소득없는 후회만 남길까 끝까지 뛰었다. 가로수 아래에서 보행신호를 기다리면서도 나는 애써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려고 했다. 행색은 더욱 물에 젖은 원숭이가 되어갔다. 그런데도 내 속에선 후회가 내려가고 이름모를 시원함이 올라왔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해본 적 없는 우중산책이 꽤나 각별했나보다. 비가 아무리 머리를 적셔도 이제는 걸었다. 콧볼에 맺힌 빗물이 들숨에 빨려 올라오면 수영할 때 느낀 시큼한 감각이 코를 탔다.

비를 맞는 것이 두려웠다면 비를 뚫고 뛸 생각은 선택지에 없었을 것이다. 우산이 없을 때 비가 멎기를 기다리는 나의 모습이 싫었던 것이다. 언제 내가 이곳에서 풀려날지 모르는 그 삶의 주도권이 박탈된 순간이 싫었던 것이다. 우산을 챙기려 되돌아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후회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후회하기로 결정한 순간에 찾아온다. 반대로, 수모들 당하더라도 꿋꿋이 이겨내면 후회할 필요가 없다. 무언가 손해봤다고 생각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 여기까지 오게 만든 선택이, 그리고 이 수모를 받아들이기로 한 선택이 부끄럽다고 생각지만 않으면 된다.

느지막히 일어나 커튼을 개니 허공이 하앴다. 거센 빗줄기는 아침잠도 없이 내리고 있었다. 이불 속에서 친구들의 걱정어린 안부 문자에 답장을 남겼다. 뉴스를 켜보니 광주에 기록이래 최악의 폭우가 쏟아졌다고 했다. 주변 침수현황을 찾아보며 커피를 내려 마셨다. 물난리에 생업의 터전이 수면아래 잠긴 모습들을 보니 나의 뽀송한 이불이 괜스레 죄스러웠다. 나는 그 물에 잠긴 도로를 보고도 나의 이웃을 걱정하지 않았구나. 나 또한 타인의 고통에 관심갖지 않는 피마른 사람이구나.

늦은 점심을 챙겨먹고 식물들의 안부를 살피러 베란다로 나갔다. 난간 가까이 놓았던 물받이통에 빗물이 꽉 차있었다. 여기저기 움푹 들어간 그릇이란 그릇은 모두 물이 찰랑거렸다. 들어찬 빗물을 가장 큰 통으로 부어 모으고 식물이 올라간 트롤리를 최대한 난간에서 멀리로 옮겼다. 젖은 정원도구를 정리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문득 영화 <기생충>이 생각이 났다. 튼튼한 기숙사에 그것도 최상층의 방에서 영화를 다시 보았다. 그들이 지난주 간 두 눈 앞에 보았을 모습들을 나는 화면으로 보았다.